❑ 자기소개서 (간증)
나의 할아버지는 전라북도 순창읍에서 “서약방”이라는 한약방을 하시면서 놀라운 의술 치료를 행하시던 분이었다. 장날이면 할아버지께서 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점심 대접을 하셨는데, 그때마다 식사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대문 밖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만큼 인품 좋으신 할아버지의 명성으로 우리 집은 지역사회에 소문난 집이었다. 집안의 장손인 아버지는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하셨기에 신문물 수용에 앞장서계신 분이었고, 자연히 아버지에게 온 동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기와 공장인 우리 집엔 넓은 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때마다 온 마당을 휘젓는 무당의 굿판이 벌어졌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환히 밝히면서까지 이어진 굿판은 온 동네의 구경거리였다. 작두를 타던 무당이 흔들어대던 대나무 딸랑이를 구경꾼 중 하나에게 건네주면, 그것을 건네받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빙의되어 그처럼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며 억울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겁에 질려 벽을 붙잡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한다.
집에 부인이 있는 데도, 방랑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할아버지께선 아버지의 둘째 부인을 집안에 들이셨다. 나는 그 둘째 부인의 자식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날, 중이 시주를 받으러 와서 아기가 사주팔자가 아주 좋다면서 열 아들보다 나은 딸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는 나를 아들처럼 키우셨고, 나는 언제나 칭찬을 들으며 온 집안의 총애와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무렵,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의 이민 같은 이사를 감행하셨다. 서울 우이동에서 아버지는 친구분과 함께 집 장사를 하시다가 사기를 당해 완전히 패가하여 우리 식구는 미아리 산동네로 이사를 해야 했다. 구멍가게를 열어 난생처음으로 과일, 채소 등짐을 지게 된 아버지는 신경에 문제가 생겨 그만 전신마비의 중풍 병자가 되셨다. 가정경제가 막막해져 밀가루로 끼니를 연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한의를 하셨기에 스스로 상태를 처방하고 쑥뜸을 놓을 치료점을 지적해주셨다. 그 시절에는 뜸을 살에 직접 올려놓고 살이 타들어 가는 방식으로 뜸을 놓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아이였음에도 아버지께서 지적해주시는 자리에 뜸을 놓았다. 언니, 오빠, 동생 중 누구도 아버지께서 지적하시는 자리에 정확하게 뜸을 놓지 못하니, 아버지는 오로지 나에게만 뜸을 놓고 안마를 하게 하셨다. 뜸을 놓을 때면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화상을 입어 흉터가 깊이 파인 자리에 재차 뜸을 놓아야 했는데, 언니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뜸을 놓는 내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면서 “어유 저 지독한 거 좀 봐라!”라고 말했다. 언니가 던진 그 말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렇게 자가 치료로 아버지는 이내 건강을 회복하셨고, 산 넘고 물 건너에 있는 상계동 논두렁 가운데에 집을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그리로 이사를 했다.
종로5가 연지동에 있는 정신 여자 중학교에 배정을 받게 된 것이, 내 인생에서 예수 그분을 만나게 된 기회가 되었다. 상계동에서 종로5가까지 통학을 하려면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고, 또 어두운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거리가 먼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가정경제가 어려워 등록금을 내지 못해 불려다니고, 시험도 보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해 늘 복도에서 벌을 서야 했다. 미션스쿨임에도 나 같은 처치의 학생을 위한 배려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다 부흥회 때 김장환 목사님의 설교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예수를 영접하는 부르심의 순간을 맞이했다. 예수를 친구로 행복한 중등 시절을 지내게 되었다.
고등학교 역시 신광 여자 고등학교라는 미션스쿨에 배정되었지만, 그곳도 전혀 미션스쿨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갈 때도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워서, 나는 교복도 입지 못한 채 입학식에 참석했고, 교복 없이 학교에 다니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가 되었다. 얼마간 일상복으로 상계동부터 갈월동까지 등하교하던 것이 내겐 상처로 자리 잡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그렇게 사춘기 여학생의 우울증을 깊어지게 했고, 나는 늘 홀로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불렀다. 구름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항상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하다 늦게 들어오는 줄로만 아셨다.
좋은 친구들과 학창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남영역 플랫폼에서 교회에서 보던 남학생을 만났다. 그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면서 장거리 통학에 서로 즐겁게 지내며 학습에 도움도 주고받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 친구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 남학생은 용산역에 있는 철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같은 학년의 학생으로, 우울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던 나에게 즐거운 일상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언제나 고난 속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주 활달하고 사교적이어서 교회의 주축으로 활동하며 교회의 어른들과 고등부 학생들 사이에선 모를 사람이 없었다. 고3이 되자, 그 남학생과는 대학에 가서 다시 만나자며 결별했다. 또 학교에서 가훈을 써내는 대회가 열렸는데, 아버지의 현란한 글귀에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셨다. 6월에는 호국에 대한 웅변대회에 호기롭게 참가하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내적으로는 우울증에 짓눌렸어도, 부모의 기대와 주님을 향한 기도로 나는 외적으로는 발랄하고 외향적인 여학생으로 지낼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 외투를 입지 못해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하굣길에 교회 지하 기도실에 들러 혼자 방언도 받고, 은혜 체험도 하고, 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를 토해낸 덕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중에, 전철 플랫폼에서 만났던 남학생에게 편지가 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다니는 지역 대학에 입학해서 철도청 일을 같이하며 열심히 생활하는 건전한 친구였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같이 출퇴근하며 주위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큼 사이좋게 지냈다. 평소처럼 함께 출퇴근하던 어느 날에 나는 나의 뇌중에 전혀 없던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을 못 하게 되면 난 주의 종이 되겠어.” 내가 뱉은 말이었지만 내 머리나 마음에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정말 느닷없는 말이었다. 내 말에 그 친구는 정색하며 “우리가 결혼을 왜 못해”하며 놀라 물었다. 나도 “그러게,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며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건 성령이 하신 말씀이었다. 뉴스에 떠들썩하게 보도될 만큼 대형 철로 사고가 일어났고, 그 친구는 그 사고로 먼저 천국으로 갔다. 난 자살을 선택했고 약을 먹은 지 3일 만에 깨어나 그 길로 1년을 욕창을 달고 누워 지냈다. 이후 몸을 조금 가누게 되자, 그 친구 집에서 나를 데려갔고, 나는 그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몸이 회복되자 나는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내가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할까 염려한 남자친구들은 순번을 짜서 나의 출퇴근을 도왔다. 그 친구들의 수고가 눈에 들어오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같은 회사에 너무나 친절한 남자에게 과거를 다 이야기하고 언젠가 나는 신학을 하게 될 것이고 주의 종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신앙도 없는 남편과 결혼을 해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나는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다. 내가 자살을 선택했던 것은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한 나의 가짜 믿음이었음을 깨닫고 청소년 선교의 사명을 깨달았다.
신학을 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잊지 않았다면서 흔쾌히 신학의 길을 가게 하였고, 나는 이후로 20년을 부교역자 생활을 해왔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 선교사에 대한 추천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나를 향한 편협한 국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2013년 5월, 큰아들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기력 회복을 위해 먹은 옻 요리가 극심한 알레르기 쇼크를 일으켜, 기도를 막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게 했다. 칼로 내 살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2인 병실의 화장실로 들어가 주님을 불렀다. 거울 안의 내 얼굴과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부딪혔고, “네가 내 앞에, 이제껏 그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내 고통보다 더 컸다는 뼈저린 통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의 통증은 더 이상 통증이 아니게 돼버렸다. 나는 통곡을 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전능자 하나님을 다시 뵈옵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프로젝트 안에서 행하는 것, 그 방법을 병실에서의 한 달 동안 다시 훈련받았다.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태국 땅을 향해 갈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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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전라북도 순창읍에서 “ 서약방”이라는 한약방을 하시면서 놀라운의술치료와 장날에 촌에서 올라온 촌사람들에게 점심을 제공하셔 줄을 서게할 말큼 지역사회에 인품도 좋으신 할아버지의 명성으로 우리집은 순창의 소문난 가계도가 되있는 집안에 장손인 아버지는 일본에 사업을 하시면서 신문물의 앞장선 분으로 온 동네에 관심의 중심에 계신분이었다
우리집은 기와공장으로 넓은마당에 때마다 무당이 온 집을 휘저으며 굿판을 벌리고 작두를 타고 대나무 딸랑이를 흔들며 다니다 건내주면 받은사람은 죽은영혼 억울한 넋두리를 죽은 그사람으로 빙의되어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며어두운 동네를 환희 밝혀 놓곤 온동네 구경꺼리 큰 굿판을 난 놀란 눈을 하곤 벽에 붙어겁에질려 바라보곤하는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나는 아버지께서 부인이 있으신데도 집엘 들어오시지 않으시고 방랑생활을 하셔서 집에 들이려고 할아버지께서 둘째부인으로 들이신 첩의자식으로 5째 딸로 태어났다 태어난날 중이 시주를 받으러 와서 애기가 사주팔자가 아주 좋다고 하며 열 아들보다 나은 딸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셨다
이런이유로 어머니는 나를 아들 처럼키우셨고 온집안에 총애를 받고 기대를 한몸에 받고 대우받으며 언제나 칭찬만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를 들어가자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 시키신다고 서울로 기차를 타고 이민같은 이사를 하셨다
서울서 친구분과 우이동에서 집장사를 동업하셨는데 사기를 당하셔서 완전 망하셔서 미아리 산동네로 이사를 하고 아버지는 태어나셔서 처음으로 구멍가게를 열고 과일 채소를 등짐을 지시다가 신경이잘못 되어서 전신마비로 몸을 쓰지 못하시고 중풍병자가되셨다
가정경제가 망막하고 끼니를 밀가루 로 연명하는 상황이되었다. 아버지께선 한의를 하셨기에 스스로 처방하시고 치료점에 쑥뜸을 뜨게 지적해주셨는데 그시절은 뜸을 살에 직접 올려 놓고 살이 타 들어가는 뜸을 뜨는 방법이었다 난 초등학교5학년으로 어린 여자아이 였음에도 언니 오빠 동생 누구도 아버지께서 지적해 주시는 자리에 놓지를 못한다면서 오로지 나에게만 뜸을 뜨고 안마를 하게 하셨다 살타는 냄새가 나고 아버지 살은 화상을 입어 흉터가 더 깊어져서 살이 움푹 파여 들어가는데도 꼼짝도 안하고 그뜸을 고자리 고대로 앉아 눈하나 깜짝 안한다면서 지독한 년이라며 언니가 “어유 저 지독한 저독한거 좀봐라” 하며던진 말은 어린 아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렇게 자가 치료로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셨고 산넘고 물건너 상계동이라는 논두렁 가운데 집을 지으시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종로5가 연지동에 정신여자 중학교에 배정을 받게 된 것이 내인생에 예수 그분을 만나게 된 기회가 되었다 상계동에서 종로5가 까지 하교를 다니려면 새벽에 어두운데 집을 나와 저녁 어두울 때 집을 가는 아주 먼 거리였다 거리가 먼 것은 문제가 되지않았다 가정경제가 어려워 등록금을 못내서 학교에서 불려다니고 시험을 보지 못하고 격리되고 준비물이 필요한 수업시간에는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해 늘 복도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서야했꼬 미션스쿨임에도 배려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다 부흥회때 김장환목사님의 설교에 눈물 콧물 흘리며 예수를 영접하는 부름에 일어서서 영접 기도와 함께 예수를 친구로 행복한 중등시절을 지내게 되었다
고등학교도 신광여자고등학교라고 미션스쿨이 배정되었지만 전혀 미션스쿨의 분위기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갈때도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워서 난 교복도 입지 못하고 입학식에 참여해 전교생에 교복입지 않고 학교가는 한사람이었다 얼마간 일상복으로 상계동부터 갈월동까지 등하교를 하던것도 내겐 상처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어려운 경제적인 짊은 사춘기여학생을 우울증으로 깊어지게하였다. 늘 홀로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불렀다 하늘의 구름의 변화를 바라보다가 늦은밤에 늘 집엘 가 어두운 늦은 시간에 들어 갔는데 어머닌 늘 공부하고 늦게 오곤 하는 줄로만 알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영역 플렛 홈에 교회에서 보던 남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오랜시간을 기다렸다면서 장거리 통학에 서로 즐겁게 지내며 학습에 도움되자고 제안해서 그렇게 가까이 친하게지내게 되었다 난 혼자 언제나 고난중에 힘들었지만 외모로 보기엔 활달하고 아주 사교적으로 교회에서 중심에서 활동하고 교회생활에 주측으로 활동 하고 있었기에 교회 모든 어른들 고등부 학생들 모두 모르는 사람이없었다. 남영역 플렛홈에서 기다리며 친구가된 남학생은 용산역에 철도고등학교 같은학년 학생으로 우울한 환경에 혼자 고군분투하며 지내던내겐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고3이되자 그친구는 대학가서 다시 보자하며 결별을했고 고등학교때도 등록금을 못내서 늘 교무실에 불려 다니던중에 가정에 가훈 써내는 대회가 열렸는데 아버지의 현란한 글귀에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장학금을 수여 하셨다. 또한 그시절에 6월에 호국에 대한 웅변대회에 호기롭게 참가하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어려워 내적으로는 우울증이 나를 눌러도 난 부모의 기대로 주님을 향한 기도로 외적으로는 발랄하고 외향적인 여학생이었다
좋은 친구들과 학창시절을 지내면서 겨울에 오바도 입지 못하고 다녀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것은 하교길에 교회들려 지하기도실에서 기도하며 혼자 방언도 받고 은혜체험도하고 늘 하나님아버지를 향하여 토해내는 기도 덕분이었다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하던중에 전철 플렛홈에서 날 기다려주며 즐겁게 지내던 남자 친구가 편지언락이 와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친구는 내가 다니는 지역에 대학을 들어가서 아침저녁으로 같이 출퇴근을 하며 철도청일도 같이 하면서 열심히 사는 건전한 친구였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되어 주위 모든 친구들이 부러워할만큼 사이좋게 출 퇴근을 하던중 나는 내 생각에는 전혀 없는 말을 하고있었다. “ 우리 결혼 못하게되면 난 주의 종이 되겠어” 이건 내가 말하는 거 였지만 뜬금없는 말이고 내 생각이나 맘에 한번도 갖어보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그친구는 정색을 하며 “우리가 결혼을 왜 못해”하며 놀라 물었다 나도 “그러게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말을 하는 거지”하고 웃으며 간과했다
그러나 그건 성령이 하시는 말씀 이었던거다 그친구가 철로 사고로 먼저 천국으로 가게 되는 뉴스가 떠들썩하게 대형 사고가 난 것이다. 난 자살을 선택했고 약을 먹은지 3일 만에 다시깨어나 1년을 누워 지내 욕창이생기고 몸을 가누게 되자 그친구집에서 나를 데려가 지내게했다. 몸이 회복되자 다시 출근을 하면서 정상생활 못할까봐 남자친구들이 순번을 짜서 출 퇴근을 도왔다 그 친구들의 수고가 눈에 들어오자 난 정신을 차리고 같은회사에 너무나 친절한 남자에게 과거를 다 이야기하고 언젠가 나는 신학을 하게 될 것이고 주의 종이 될 것 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믿음도 없던 남편과 결혼을 하고 안정적 삶을 살면서 다시 예수께 돌아왔다 그러면서 자살을 선택한 내가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해서 믿음이 가짜였음을 깨닫고 청소년 선교의 사명을 깨달았다
신학을 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 한이야기를 맘에 갖고 잊지 않고 있었다고 흔쾌히 신학의 길을 가게하였고 20년을 부교역자 생활을 해오다가 목사 안수를 받고 태국선교사 에대한 추천을 들었을 땐 내가 나를 붙잡고 있었고 편협한 국지주의에 잡혀 있었다 2013년5월 큰아들 결혼 날짜를 잡아놓은 시기에 뜻하지 않게 지인이 기력이 쇠히다고 기력회복으로 먹은 옻오리가 안 팎으로 극한 알러지 기도를 막는 쇼크에 죽음에 이르러 온몸은 화상을 입은 듯 뜨겁고 따겁고 간지럽고 아프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통증에 칼로 내 살을 도려 내고 싶을 만큼 자해하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고 2인실이라 화장실로 들어가 주님을 부르자 얼굴이 앞에 거울에 내눈이 부딪혔고 하나님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 네가 내 앞에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내앞에 서 있었다”라고
난 통증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 마음이 내 고통보다 더 크셨다는 것을...
난 통곡을 하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았다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을 다시 뵈옵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안에 사는 법으로 병실에서 한달을 훈련 받았고 이제 태국 땅을 향해 갈 수 있는 제가 되게 하셨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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