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r's maxim :: 요새 애들은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건지 2018/06/27 17:56 by yorq


  할아버지 의사는 염증이 있기는 한데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며 손목 쓰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애 낳고 나면 마디마디가 다 약해져. 모유 먹이면 약도 편하게 못 쓰는데, 물리치료 받으러 올 수 있어?"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손목 많이 쓰지 말고 잘 쉬어. 어쩔 수 없지 뭐."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말하자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냐?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_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148~149쪽.

덧글

  • 웃긴 늑대개 2018/06/28 09:42 # 답글

    옛날에는 죽기 직전이라도 말을 못하고 산거고... 요즘에도 세탁기,청소기 있어도, 애 낳고 가서노동하기는 진짜 힘든데...
    물론 가사노동만 하는거라면 꿀이지만... 애 낳고 고생하는 사람한테 저렇게 이야기하는 건 좀...
  • yorq 2018/06/28 23:28 #

    직장 생활과 가사 노동을 병행하든, 가사 노동만 하든, 둘 중 어느 경우든, 가사 노동에 관해 3자는 쉽게 말하기 마련인데요.
    이 책을 보고 가사 노동만 하게 돼버린 당사자 자신이 겪는 회한과 비애를 조금 공감해보게 되었습니다^^
  • 몽부 2018/06/29 12:10 # 답글

    어느 부부가 .. 남자쪽이 집에서 전업주부를 하고 .. 여자쪽이 나가서 돈벌어오는 .. 그런 집안이었는데 ..
    그 남편에 대해 동네 아줌마들이 수근거리더랍니다.

    집에서 [놀고 먹는다] 고 ..

    자기들도 가사노동이 별게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는겁니다.



    .... 라는 글을 본게 기억나네요 ㅋ
  • yorq 2018/06/29 12:20 #

    저도 그 짤 봤는데요. 남녀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이 가사 노동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괴롭다는 호소를 엄살로 치부하는 태도 같아요. 정말로 힘들고 괴로워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 비극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가령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초딩을 두고도 엄살이 심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몽부 2018/06/29 12:29 #

    음 .. 가사노동이 힘들다고 말하는 집단과 가사노동이 별거아니라고 말하는 집단이 동일하다는 점이 유머의 포인트 였던 것 같습니다만 ..

    학업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초딩에게 엄살이라고 말하는 자가 보통은 .. 같은 초딩은 아니지 않나요 .

    그리고 .. 가사노동은 힘들면 하루쯤 쉴 수 있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몽둥이 들고 서있는 건 아니지요.
    그리고 .. 가사노동에 대해 다들 쉽게 말하는 이유중에는 .. 다들 어떤형태로든 조금이나마 경험이 있어서 가 아닐런지요.

    ... 점심시간 근처 ;; 배고파서 끄적인 헛소리입니다. 밥먹으러 가보겠습니다 (_ _)
  • yorq 2018/06/29 12:34 #

    말씀 듣고 보니 '아무나 못하는 거다.'보단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다.'는 생각이 가사 노동에 깔려 있어서 쉽게 말하게 되는 것 같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맛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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