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sonable apollon's mind :: 악의에 찬 외계 문명 2018/07/16 20:07 by yorq

공상 과학 소설과 UFO 문학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가 문명과 문명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외계 문명이 소유한 우주선이나 광선총이 우리 지구 문명의 것과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쌍방이 대등한 수준의 전력을 갖고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실제로 은하의 어느 두 문명권이 대등한 수준일 리가 없다. 그 어떤 대결에서든 항상 한 문명이 다른 문명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100만 년이라는 세월은 엄청 긴 시간이다.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가진 문명권이 지구로 와서 무엇을 한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그들의 기술과 과학의 수준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앞설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 족의 만남이 그랬고 코르테스와 아스텍이 그랬다. 라 페루스와의 만남 이후 틀링지트 족이 겪어야 했던 최후 운명이 또한 그랬다.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도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의 성간 함대가 우리 하늘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들과 잘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_ 칼 세이건, <코스모스>(양장), 506쪽.

***

대학 시절, 동기 우승이는 우주 전쟁(지구인 vs 외계인)을 소재로 SF 스토리를 쓰고 있었다. 우승이는 만약 외계인이 있고, 우리와 만나게 되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했다. 나는 사이좋게 지내도 되는데 왜 꼭 전쟁이 일어나야 하냐고 물었다. 우승이는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타자를 만나면 일단 적대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고 했다. 역사상 낯선 타자가 만나 평화로웠던 적이 거의 없으니, 외계인이야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인간은 기어이 외계인을 공격할 거라고 했다. 그 대답이 바로 우승이가 쓰고 있는 스토리의 테제였다.

평소 공포란 무지에서 비롯되며, 그 공포는 빈번하게 폭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우승이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무리 중 조금이라도 이상(다른 모양)한 누군가가 있으면 어떻게든 각종 차별과 괴롭힘으로 대접하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니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외계인이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외계인이 있다 해도 우리랑 만나선 안 되겠다 싶었다. 만나면 싸울 테고, 싸우면 많이 죽을 테니까. 근데 실은 말이 그렇지, 외계인이든 전쟁이든 1g도 걱정되지 않았다. 외계인이란 건 그야말로 사람들의 자유로운(무책임한) 공상(망상)이 낳은 농담 정도로 여겼으니까.

그런데 과학자들이 어째서 외계 지적 생명체를 논하는지, 그들의 일리를 1g 접하고 나니, 그 일리에 동조하게 됐다.

뭇 과학자들이 외계 지적 생명체에 관해 긍정하는 대강의 근거는 이렇다.

- 온 우주는 같은 물질과 같은 물리법칙으로 작동한다.
- 지구가 지닌 조건에서 인류라는 지적 생명체가 탄생해 살아간다면,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행성에서도 지적 생명체가 기꺼이 탄생해 살아갈 수 있다.
- 광막하기 그지없는 우주는 그런 후보군을 무수히 품고 있다.
-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의 증거 부재가 '외계 생명체가 부재한다'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 따라서 지구 외, 인류 외에도 지적 생명체가 있을 것이다. 우주의 광막함을 고려하면 외계 지적 생명체가 없다는 판단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이제 위에 인용한 칼 세이건의 근사한 논증을 본다.

- 상대방을 적대하는 태도를 지닌 존재는 긴 시간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자멸한다.
- 저들은 긴 시간 속에서 자멸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 따라서 저들은 상대방을 적대하는 태도를 지니지 않았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설명이다.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상대방이 평화를 추구하니 우리는 저들과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칼 세이건의 추측 안에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성숙의 방향이 묻어 있다. 인류가 긴 시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처럼 지들끼리 투닥투닥해선 안 된다. 지금처럼 투닥투타하는 건 우주 내 지적 생명체의 자격을 거부하는 일이다.

이런 칼 세이건의 추측을 들으면 우승이가 뭐라 할지 궁금하다.


덧글

  • 존다리안 2018/07/16 22:23 # 답글

    은하 제국 같은 게 원시부족(!)인 인류를 포섭해 병사나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해 밑작업을 한다.... 라는 식의
    설정도 가능할 지도요. 아니 인류 자체가 은하제국의 의도에 의해 인공적으로 진화했거나...(젤나가)

    인류 외의 다른 외계문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상 우리가 우주에서 문명을 이룬 초기의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우리가 젤나가다!)
  • yorq 2018/07/16 22:52 #

    지구를 찾아올 정도의 과학기술 수준이면, 부려먹을 노예가 불필요하지 않을까요?
    인류가 온 우주의 최초이자 유일한 지적 생명체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젤나가가 뭔가요?^^
  • 나인테일 2018/07/16 22:53 #

    지구를 찾아올 정도의 과학기술이 있다면 노예는 직접 만드는게 낫습니다. 이미 인간도 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지요. 메이드로봇이라고 (....)
    인간의 노예로서의 가치가 메이드로봇보다 단 하나라도 나은게 없는걸요.
  • 존다리안 2018/07/16 22:56 #

    yorq님께
    https://namu.wiki/w/%EC%A0%A4%EB%82%98%EA%B0%80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초월적인 외계종족입니다.
  • 나인테일 2018/07/16 22:30 # 답글

    악의라는건 자기가 피해를 입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어야 갖는거죠. 사람이 닭이나 돼지에게 악의를 갖진 않잖아요.
  • yorq 2018/07/16 23:04 #

    자기가 피해를 입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어야만 악의를 갖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악의란 말은 그보다 더 광범위한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말 같아요. 사람이 닭이나 돼지에게 피해를 입진 않지만, 그것들을 잡아 해치우려는 마음을 어떤 면에선 악의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존다리안 2018/07/16 23:16 #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종의 생태 그 자체가 다른 종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 가메라 시리즈의 레기온 같은 경우 거대한 식물형 개체,곤충형,곤충형의 모태가 되는
    거대개체가 한 무리가 되는 하나의 생태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들은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행
    성에서 규소를 기반으로 성장해서 그 행성을 덮은 뒤 식물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무리를 형성하는
    포자와 곤충형 레기온을 우주로 날려보내서 다른 행성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이들은 번식하면서 부산물로 대량의 산소를 배출하고 그건 식물의 폭발력의 원천이기도 하며
    특히 산소는 과도하게 증가하면 지구에 사는 생물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지요. 그런 식으로 레기온은
    지들끼리만 살아남는 환경을 계속 조성합니다.

    극도로 발달한 아니 우리와 같은 지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진화를 통해 우주로 뻗어
    나간 그것이 생태인 생물의 경우 어쩌면 어떤 의식을 갖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생태 자체가 다른
    생명체에게는 해악이 될 수도 있지요.
  • 나인테일 2018/07/16 23:26 #

    세이건의 말을 잘 생각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대라는건 싸웠을 때 자신이 당할 가능성이 있을 정도의 자격을 가진 상대에게 갖는 감정입니다. 어느정도 선 이하가 되어버리면 그냥 자원이 되어버리는거죠.

    극단적으로는 우리가 유전자를 조작해서 원래 자연 상태에서 대사작용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분비물 대신 인간을 위한 약을 뿜어내며 이상한 삶을 살아가는 대장균들에 대해 닭이나 돼지처럼 그래도 인간과 시선을 마주할 수는 있는 존재들만큼의 연민의 감정을 가지냐는 것이죠. 선악에 대한 감정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의 짧은 진화의 산물이라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면 말도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인간의 장 속은 유산균의 양계장이나 돼지우리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라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다른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쥐어짜내가면서 밖에 살아갈 수가 없거든요. 이 과정 속엔 선도 악도 없죠. 생명은 수십억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이걸 종으로서의 나이가 백만년도 안 된 인간이 멋대로 옳다 그르다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우주의 나이가 130억년이니 지구 생명 진화의 역사가 우주의 전체 역사에 비춰봐도 절대 짧은게 아닙니다. 그 긴 시간을 다들 그냥 그렇게 살아온거죠.

    과연 성간 생태계라는 것이 존재할 경우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이 어디까지 통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채널 2nd™ 2018/07/22 16:47 #

    소 한마리 잡아 먹을라고 했는데 자꾸 안 잡히면 ㅎㅎ "악의"가 생길 겁니다.
  • 앞서나가는 꼬마눈사람 2018/07/16 23:01 # 답글

    멋진글이네요
  • 존다리안 2018/07/18 19:28 # 답글

    트랙백 신고합니다.
  • 채널 2nd™ 2018/07/22 16:49 # 답글

    >> 상대방을 적대하는 태도를 지닌 존재는 긴 시간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자멸한다

    여기서 에러~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탈탈탈 털어먹은 양키들은 현재 초월강국으로 독보적으로 잘만 살고 있는데 -- 그렇다고 양키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무슨 양심의 고백(통석의 념이라든가... 통절한 자아 비판이라든가)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

    (칼 세이건도 한때 우주 개발에 사용된 불쏘시개가 아니었을까 -- 개인적으로 본인이나 마누라나 겁나 잘 나가기는 했지만..)
  • Dancer 2019/01/18 03:06 #

    그건 짧은 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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