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inute comment :: [도서] 김영하 -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2021/06/24 14:38 by yorq




과거에는 책 욕심이 있던 터라, 해당 작가가 발간한 저서를 몽땅 사 모으곤 했다. 그런 문학가가 4명 있는데, 그중 하나가 김영하다. 물론 그의 책을 전부 읽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김영하의 책은 모두 갖고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전부 읽을 수 있다는 심적 안정감을 확보해둔 것이다.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좋아했고, ‘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라는 글을 좋아했으며, 수년 전엔 신간 낭독회에 제 발로 찾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와 뚜렷한 불화 없이도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얼마든지 멀어져 버리는 것처럼, 내 딴에 김영하는 그런 식의 친한 친구로, 멀어진 채 지내왔다. 그러다 최근 동참한 독서 모임을 통해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감사하게도 모임장께서 책을 선물해 주셨다.

나는 여전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달리 있는 게 아니라, 재미있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도 있고, 재미없을 수도 있는 건 이야기하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명암이 갈리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작가란 어떤 이야기든지 간에 좋은 솜씨로 재미있게 전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작가들은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그 솜씨라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 솜씨란 건 작가가 구사하는 구체적이고 적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작가들은 그 무엇에 관해 남들보다 오래 숙고하고, 깊이 몰두한 끝에 가장 정확한 표현을 개발해낸다.

그래서 솜씨 좋은 작가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번잡한 상념들이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는다. 머릿속에서 분명히 감지되고 있으나 언설하기엔 역부족인 그것들이 작가의 문장으로 간결하게 맺혀 있는 걸 보면서 한없이 통쾌해지는 것이다. 독자는 그렇게 작가에게서 말을 하나 더 배운다.

  <여행의 이유>에서는 ‘3장. 오직 현재’가 내게 그러했다. 이 장에서 작가는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 있게 한다고 말한다. 비록 우리의 습성이 과거를 후회로, 미래를 불안으로 가득 채울지라도 여행은 그것을 초월한 생생한 현재를 선사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가가 꼽은 여행의 이유 중 하나다.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긴 거리를 뛰고 걷는 일을 진정 좋아한다. 그 시간 속에서만 허락되는 멍 때리기가 더없이 좋아서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 홀로 막연히 생각하던 멍 때리기의 전모를 좀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몸의 반응이란 정직하고 즉각적이어서 혹독하게 몸을 놀릴 때야말로 과거와 미래는 사라진다. 작가가 말한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 오는 초월의 경험”이다.

물론 그것도 잠시, 과거와 미래 때문에 낙담해야 하는 모드로 곧 돌아오고야 만다. 그래도 몸을 놀리며 멍을 때릴 때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자꾸 멍 때리고 싶다.

작가는 구체적이고 적확한 표현을 통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한다. 그다음 비결은 통찰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독자가 품어봄 직한 생각을 다루고 있다면 독자는 그 정확한 표현들에서 쾌감을 느끼고, 독자가 품어봄 직한 생각을 넘어선 것이라면 독자는 거기에서 작가의 빛나는 통찰을 맛본다. <여행의 이유>에서는 ‘7장.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이 그러했다. 이 장에서 작가는 여행지에서 대가 없이 받은 환대를 되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대가 필요한 사람에게 갚는 순환을 통해 세상이 번성해왔다고 말한다. 여행이야말로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실현하는 경험이기에 이것은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가 되어준다.

나는 이제껏 대를 물리며 전해지는 보은의 순환이 세상을 떠받치는 일반적인 원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보은의 순환이 여행에서는(물론 인생사를 여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환대의 순환으로써 적용할 수 있구나 싶어 지평이 좀더 열린 기분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지난 여행들에서 대가 없는 환대를 베풀어준 사람들을 곰곰 떠올려 봤다. 초딩 시절 개교기념일에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갔는데, 보호자 동반 없이는 놀이기구를 탈 수 없자 자기가 보호자라며 놀이기구에 동반해준 대학생 형, 중딩 시절 시모노세키항에서 볶음밥을 사준 재일 교포 어른, 고딩 시절 진귀한 열대 과일과 음식을 끝없이 내어준 필리핀 모롱 마을 주민들, 대딩 시절 뉴욕 투어를 도맡아준 제프쏭 형, 열거하자면 끝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내가 받은 환대를 다른 사람에게 갚은 적은 거의 없다. 내가 이토록 양심 없는 인간이다.

  <여행의 이유>라는 책 제목은 꽤나 통속적이고 시시해서 그다지 구미를 당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이만한 제목이 또 있겠나 싶다. 그리고 또 이런 제목으로 이만한 글을 써낼 수 있는 작가가 또 있겠나 싶다. 김영하가 말하면 역시 재미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